Friday, December 2, 2011

허해구선사 글들

박재현이 올린 글의 펌입니다


-현대불교 비판-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사라지고 의식이 명경같이 총총해져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거짓된 깨달은 자들은
깨달음은 절대 청정해야 한다는 관념에 얽매여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도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모든 인연을 끊고 멍하게 앉아 밥이나 축내면서
관념적인 소리나 하고 사는 것이다.

깨달은 자는 모든 욕망과 거짓과 아상을 버리고
오직 진실과 사랑만이 남아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공덕행에 생명을 바친다.

명경처럼 맑은 마음에 세상의 잘되고 잘못되는 일들이 그대로 비치고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기에
잘못되고 불행한 일들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공덕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았다고, 절대 자유를 얻었다고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버리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자는
저 혼자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져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 자이지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이 참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눈앞에 있는 세상 일을 물어보면 된다.

깨달은 자는 망상이 없어
눈앞에 비친 일들과 이치를
비치는 대로 쉬운 말로 표현할 뿐이지
태극이나 무극과 같은 보이지 않는 우주적 움직임이나 관념적인 논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명,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치에 맞게 한치의 의문없이 대답을 해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실상 속에 있는 일에 대한 인과법을 설하지 않고
산속에 앉아 깨달음에 대한 관념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그는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을 얻지 못한 상태이고
세상을 위해 일할 양심과 용기가 없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산속에 혼자 앉아 가만히 생각만으로 깨달음을 얻는 길은 없으며
보이지 않는 눈이 한순간에 보이는 이치는 절대 없다.

모든 것은 원인을 지어야 변화가 생기는 것이니
마음에 업이 있는 자가 완전한 반야심을 얻고자 한다면
길을 배우고 깨우쳐 마음을 닦는 공덕행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의 제자라면 부처님이 설한 실상의 법을 배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세상을 축복하는 공덕행을 통하여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업장을 다 태워버릴 때
비로소 업이 사라진 반야지경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공덕행을 통해 원인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화두만 잡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원인을 짓지 않고서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인과법에 반하는 논리로서
가만히 앉아서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요행수로
현실에서 살아가기 힘든 근기가 허약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수행법인 것이다.

산자에게 마음을 버리라는 것은
현실에 부딪히며 일어나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과 같으니
결국 현실을 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하게 살라는 말과 같다.

현실을 버린 상태에서 현실에서 들려오는 모든 감각의 원천을 차단하면
마음의 변화가 없어 평안하기야 하겠지만
그 마음은 생동하는 생명체의 살아 움직이는 마음이 아니라
죽은 자의 무감각한 마음과 같이 것이니
더 이상 자신을 좋게 만드는 원인을 짓지 못하는 말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버리라는 말은 깨달음의 실상과 어긋난 말로서
주체적인 삶과 인간농사를 포기하는 거짓된 깨달음의 전형적인 허위관념인 것이다.

산자가 생명의 근본인 의식과 의식이 환경과 부딪혀 일으키는 마음을 버리면
주인 없는 자리에는 귀신 밖에 들어올게 없다.
자기의 마음과 의식을 버리고 멍한 상태에 빠지면
주인없는 몸에 유혼이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하여
그 사람은 귀신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마음을 버리라는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수많은 명상하는 자들이 마음을 놓고 함부로 신을 받아들인 관계로
갑자기 한소식하여 깨달았다고 신놀음하는 자가 많은 것이다.

마음을 버리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욕망이 난무하는 어두운 세상에서
헛된 탐욕과 집착, 망상에서 벗어나 나쁜 업과 한을 짓지 말라는 뜻이다.

즉 칠불통계와 같은 이치로
좋은 마음은 기르고 나쁜 마음은 버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법은 깨달음의 실상을 모르니 전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전하여 세상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상에 대한 가르침이며 완전한 인과법의 설파인데
지금 불법은 공사상에 빠져 사실을 멀리하고
관념적인 깨달음의 논리가 한창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참선법이다.

선법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다.
선법은 불가의 선정이 중국에 와서 도가의 좌선법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것이니
어찌 천년 이후에 나타난 참선법을 부처님의 정법이라 하겠는가?

화두는 이치에 닿지 않은 끝없는 수수께끼이니
그 속에 빠지면 그 길없는 환상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길이 없으니 더 엄청난 것이 있겠지 하는 착각에 빠져 끝없이 헤매게 되고
근기가 허약한 자들은 그 속을 헤매다 지치고 허약해져 갈망에 환상을 보게 되고
그것을 보고 진짜 자기가 깨달은 줄 알고 헛된 관념적인 소리나 귀신놀음을 하며
자신과 세상을 속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 깨달았다는 조사들의 가르침 속에는
세상을 보는 깨달음의 지혜가 없고
세상을 밝히는 사실적인 인과법을 설한 사례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성철 스님이 양심적인 것은 임종시에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친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말을 해야 그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이 이러할진데
어찌 증거도 없는 과거 조사들이 깨달았다고 할 것인가?

깨달은 자가 나왔다면
모든 일은 사실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깨달았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허공 속에서 땅따먹기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직접 가르치신 초기의 실상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선법을 제일이라고 따르며 환상적인 공만 이야기하는 자들은
부처의 제자가 아니라 조사의 제자일 뿐이니
잘못된 인연에 빠져 자신의 인간농사를 망친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라즈니쉬에 대하여-



라즈니시의 글은 그럴듯한데 그 속에 진실이 없다.
명상에 대한 글은 있는데 삶에 대한 글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정견을 얻어 실상과 인과법을 본 자가 아니다.

그는 깨달음이란 본래부터 텅 비어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행복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텅 비어있음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행이란 인간이 비어있음을 즐기지 않고
인위적으로 무엇이 되고 억지로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에 오는 생트집이라고 본다.

아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낀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으로 마음을 비워버려도 내면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업이 스멀스멀 피어나는데
어찌 더 이상 갈증없는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환상으로 보는 관념적 사고 때문에 생겨난 오류이다.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깨달음은 마음을 비워 깨치는 것이 아니라 공덕의 실천으로 업을 태워 이루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세상은 환상이며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본래부터 텅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해탈에 이르며 지복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과 생생한 삶을 경시하고 삶을 명상으로 대체하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세상을 부정하는 이유는 세상의 존재이유를 무명(마야)으로 보아
이 세상을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의 실체를 둘러싼 환영에 불과하므로
어느 것 하나 부정할 것도 긍정할 것도 없으니 모든 구별과 판단을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신의 몸짓으로 받아들여 신과의 일체감 속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명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낙공(도무론, 허무주의)에 빠져
완전한 법계 속에 존재하는 실상과 생생한 삶을 한갖 꿈으로 관념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추종자들은 현실속에서 공덕을 쌓는 생생한 생명과 진리의 길을 무시하고
인생을 단순히 즐기고 명상하는 꿈으로 생각하고 살아감으로써
그들의 집단인 아쉬람은 성적 타락과 마약의 소굴이 되어 인도사회의 큰 비난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 맑게 개인 완전한 의식을 얻는 것은
바른 이치를 깨닫고 진실을 끝없이 추구할 때 다가오는 삶의 열매인 것이지
현실과 유리된 명상이나 마음의 자각만으로 얻는 경지는 절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명상으로 텅빈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해탈과 지복이 온다는 이러한 시각은
진리를 배우고 깨우쳐 공덕을 쌓아야만 이룰 수 있다는 부처님의 정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신에 의지한다던가 명상이나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며 이치에 맞지 않은 비진리로서 이런 주장을 외도라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런 말법들이 아직도 남아 힘을 쓰는 것은
어두운 세상 속에는 업이 두터운 자들이 많아 바른 인과법보다 허황함을 좋아하게 되고
이런 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탐욕스럽고 위선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과의 이치에 따라 꾸준히 공덕을 쌓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루하기 때문에
신에 의지해 쉽게 구원을 얻거나 한소식하여 빨리 깨달음을 얻는 명상비법에 더욱 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법계 속에서
바르고 좋은 원인을 짓지 않고 완전함에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고 하거나 삶을 무시하고 생각으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 외도이며 사법인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법계와 인과법을 부정하고 세상에 허무와 혼돈을 전하는 라즈니시는
정각을 얻은 자가 아니라 관념 속에서 말법을 전하는 어둠의 사도인 것이다.

그는 행복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텅빔을 알면 지복을 누린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니 행복도 마음만으로는 안되며 현실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을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인간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정신과 함께 육신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고 불안하니까 행복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 행복이 실현된 적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행복을 손에 잡을 수 없는 신기루로만 생각하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니 그 이치를 알고 원인을 찾아 실천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농사일도 때를 가려 지킬 것을 지키고 행할 것을 행해야 풍년이 오듯이
삶의 행복도 인간의 길을 지키고 가꾸면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며 행복의 법칙은 무엇인가?
인간세상에서 행복이란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마음만 비워서는 안되며 그러한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수입범위 내에서 지출하다보면
점차 삶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풍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이 많아 사치스럽고 허영이 많으며 게으르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은
안정된 삶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양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밝고 좋은 마음이 있어 바르고 성실하게 일하면 신임을 얻어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된다.
서로 위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의지하고 축복을 나눈다면
나쁜 일을 이겨내며 외롭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마음이 밝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에 어둠이 없고 항상 맑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
아무리 부귀와 권력을 누린다한들 그 마음이 불안하고 죄스러우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면, 검소, 양심, 사랑, 정직이 행복을 얻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과 더불어 함께 흘러가는 인생이다 보니 좋은 세상을 만나야 한다.
어둡고 위험한 사회에서 개인이 아무리 모든 조건을 갖춘다 해도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불행한 일이 자기에게 없을 때, 자기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고 또 항상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맑고 공정하고 평안한 환경을 만나는 것이 행복의 외부적 조건인 것이다.

더러운 탁류 속에서는 아무리 고고하게 산다한 들 구정물이 묻지 않을 수 없듯이
바른 이치가 사라지고 정의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올바르게 열심히 살아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운 것이다.

캄캄한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장님의 시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눈을 감고 장님처럼 살아가는 게 오히려 편한 것이다.

오늘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자가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진리가 뒤집어지고 정의와 양심이 숨을 죽인 어두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만 좋아져서는 안되며 이 세상도 함께 좋아져야 한다.
그 길이 바로 바른 이치를 세상에 전하고 축복하는 공덕행인 것이다.
그래야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행복이 아니라
인간 세상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상천국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
인간 스스로가 해야 하며 귀한 진리의 인연을 만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어디에도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에 대한 진실과 바른 이치에 눈뜨지 않으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어떻게 해야 행복한 세상이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동안 세상에 나타난 수많은 유토피아들은 행복해지는 길을 모른 채 이상으로 그린 세상이었기에
모두 실천할 길이 없는 존재하지 않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법의 인연을 만나 세상의 진실과 이치를 배워야 한다.
법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인과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치 속에 있는 일들을 알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욕망없이 살다 사라져가는 것이 가능한가 물었다.

욕망없이 산다는 것과 소망없이 산다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은 욕망은 부려서는 안되지만 인간이 가야할 소망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진리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이 구분이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이 혼돈 속에 방황했던 것이다.

소망은 모든 것이 순리에 맞기 때문에 일할수록 삶이 건전해지고 무르익지만
욕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집착할수록 거짓이 생기고 마음이 병들어 자신을 망치게 된다.
따라서 좋은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할 때 인간의 뜻과 소망이 완성되며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함부로 허황된 욕심을 부리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 형제, 처자, 친구들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이 인간이 가야 할 참된 소망이 아니라 세속의 굴레에서 바라보는 탐욕이라면
그러한 요구에서 벗어나 참다운 보람과 가치를 이루는 것은
자신에게서나 부모, 처자, 형제, 친구 모두에게 축복되는 일인 것이다.